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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중앙탐) : 중원문화의 중심 국보 제6호

 

 

 충주하면 떠오르는 것중에 하나인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 입니다. 흔히 충주 중앙탑이라고 말합니다. 왜 중앙탑이냐하면, 지리적으로 우리나라의 중앙에 위치하기 때문입니다. 역사적인 유물인 충주 탑평리 칠층 석탑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 지정번호 : 국보 제6호

 - 소  재  지: 충북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이 석탑은 지리적으로 우리나아의 중앙에 위치한다고 하여 중앙탑(中央塔)이라고도 불리고 있다. 탑 주변에서 옛기와가 나왔고, 석탑 바로 앞에 석등받침돌로 보이는 8각 연꽃무니 받침돌이 남아 있어 이 일대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대가람(큰절)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관련된 기록이 없어 사찰(절)에 대한 내용은 알 수 없다.

 

 

 탑의 높이가 12.9m로 그 시내의 석탑으로는 가장 높고 크다, 일본 강점기 때인 1916년 조사에 따르면 탑이 기울어 무너질 염려가 있다고 하여 다음해에 이 탑을 전면 해체 복원하는 공사가 있었으며 공사 당시 석탑의 몸체인 탑신부와 받침부분인 기단부에서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수수습 유물은 6층 옥신에서 서류편과 구리거울(동경) 2점, 목제칠합, 은제사리합 등이 나왔고 기단부에서 청동제유개합(뚜껑이 있는 청동제 작은 합)이 나왔으며 은제사리합 안에는 유리로 만든 사리병과 몇 개의 사리가 흩어져 들어 있었다고 한다.

 발견된 유물들로 보아 유물의 연대차이가 나타나는데 특히 동경(구리거울) 2점은 고래시대의 것으로 추정되어 이 석탑이 세워진 이후 고려시대에 와서 재차 봉안의식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탑의 구조는 2층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에 상륜부를 구성한 일반적인 모양의 석탑이다. 기단부(탑을 지지하는 받침돌)는 땅을 다진 후 바닥에 10여장의 평평한 크고 긴 돌들로 놓여진 지대석 위에 올렸는데 상층과 하층의 면석과 갑석이 여러 장의 편평한 돌로 짜여진 것은 그 석탑의 규모가 아주 크기 때문이다.

 

 

 하층기단의 면석과 상층 면석에는 기둥과 받침을 의미하는 우주와 탱주가 표현되었는데 석탑표면에 나타나는 탱주의 수가 일정하지 않게 놓인 것을 해체 복원시 착오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특징 중 하나로 보이는 부연이 기단상층 갑석 아래 부분에 새겨져 있다.

 

 

 탑신부도 하층에는 여러 매의 돌로 짜여져 있고 위층으로 가면서 석재의 소가 적어지면서 맨 윗부분인 6~7층은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탑신을 받치고 있는 옥개석의 밑면에는 5층의 단으로 깎아서 다듬었고 상면은 2단각형의 괴임을 만들어 그 위에 옥신을 바치고 있는데 이 또한 신라석탑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옥 개석의 낙수면은 얇은 듯 평평하며 네 귀퉁이의 곡선 표현도 매끄러워 대규모 석탑으로는 경쾌한 탑신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네 귀퉁이에 풍령(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있어 창건 당시 웅장한 모양에 미적 감각을 곁들인 당대에 손꼽힐만한 아주 훌륭항 석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상륜부의 특이한 점은 이 중의 노반위에 복발과 양화를 구성한 점이다. 노반석을 2개로 겹쳐 올린 것을 유래가 없는 특이한 모습이라고 볼수 있다. 석탑의 규모가 커서 웅장하기는 하나 기단부와 탑신부의 세부수법에 있어 정교하거나 섬세함이 약한듯하고 전체 형태도 높이에 비해 너비의 비율이 작아 높은 느낌은 있으나 안정감이 다소 적어 보인다.

 

전체짜임과 각 부부의 조성양식으로 보아 석탑의 건립연대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탑을 뒤로하고 서있는 작은 둘째 아이. 그리고 멀리 보이는 집사람..

 

 

충주 탑평리 칠층석탑에 얽힌 전설

 - 나라의 중앙을 표시하기 위하여 탑을 세웠다는 것으로 이곳에 먼저 임시로 탑을 세우고 건장한 사람을 영토의 남과 북의 끝에서 여러차례 동시에 출발시켜 보았는데 그때마다 이 곳 탑평리에서 만나게 되어 이곳이 중앙임을 확인하여 거대한 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래서 탑평리 칠층석탑 보다는 "중앙탑"으로 더욱 많이 불리고 있다.

 - 통일신라시대 옛 중원경이었던 충주지역에 왕기가 발흥하고 있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설도 있다.

 - 신라시대에 명필 김생이 절을 짓고 서적을 보관하기 위히여 건립하였다는 설인데, 이는 금가면 유성리 반송에 김생사지가 있었음이 밝혀져 중앙탑과 김생건립설은 무관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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